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4대 센터]] 내에서의 위치 === 결론부터 말하자면 4대 센터 내에서는 말단의 위치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거의 없으며, 커리어 마일스톤에 있어서 나머지 세 명과의 간극 역시 상당히 큰 편이다.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3인의 주요 키워드를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 [[샤킬 오닐]]: MVP 위너, 조던과 더불어 3연속 우승 및 파이널 MVP 3연패를 달성한 단 둘 뿐인 선수[* 마이에이 히트로 이적해서 4번째 우승을 했다.] * [[하킴 올라주원]]: MVP 위너, 올해의 수비수상 x2 위너, 2회 우승 달성 및 파이널 MVP x2 위너 * [[데이비드 로빈슨]]: 2회 우승 달성 및 조던과 더불어 MVP, 올해의 수비수상, 득점왕을 모두 보유한 단 둘 뿐인 선수 상기한 오닐의 경우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포지션 불문 NBA 역사상 Top10 내에 들어가는 선수이고, 나머지 둘은 유잉에게 없는 MVP와 DPOY를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올라주원의 경우 플레이오프에서 훨씬 강해지는 면모를 보이며 팀 동료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1994 휴스턴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조던조차 해보지 못한 '''MVP+올해의 수비수상+파이널 MVP 동시 석권'''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으며 이어지는 두 번째 우승으로 오닐에 버금가는 족적을 남겼다. 오닐과 올라주원은 최전성기 기량만 따지면 무려 조던과 비교되는 선수이니 만큼 유잉과의 고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는 것. 셋 중 그나마 평가가 쳐지는 로빈슨의 경우 파이널 MVP를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정규 시즌에는 조던&르브론에 비견될만한 2차 스탯을 뽑아내는 선수였다. 반면 유잉은 올-NBA 팀과 올-디펜시브 팀에 있어 크게 손해를 본 건 사실이나 일단 우승이 없고, MVP 수상자인 저들과 달리 MVP 포디움(Top 3)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4~5위는 심심찮게 기록했고 보통 MVP 레이스 5위까지는 어느정도 유의미한 득표로 쳐주기에 리그 Top 5급의 기량은 자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정말 치열하게 MVP를 두고 경쟁할만한 시즌을 보낸 적은 결국 없다는 뜻도 된다. 물론 유잉은 센터 세컨드 팀에 6차례나 들어간 선수인 만큼 수상 경쟁에서 올라주원, 로빈슨 둘 중 하나를 제낀 적은 많다. 그러나 커리어의 '고점'이 나머지 셋보다는 확연히 낮고, 무엇보다도 분명히 우승의 기회가 왔을 때 본인이 올라주원 앞에서 극악의 부진을 보이며 우승을 놓친 점이 상당히 치명적인 부분이 된다. 그렇게 부진했어도 휴스턴과의 파이널이 7차전까지 가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유잉이 올라주원에게 짓눌리는 와중에도 시리즈가 마지막까지 진행될 정도로 휴스턴이 닉스보다 나을 것 없는 전력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장 그 다음 시즌에 마찬가지로 올라주원에게 잡아먹혔다고 평가받는 로빈슨조차 해당 시리즈에서 23.8득점을 ts%0.554로 집어넣은걸 생각하면, 비교하는게 로빈슨에게 실례일 정도로 가로막힌 유잉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 다만 유잉이 저 넷 중 가장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저들과 급이 다른 선수라고는 할 수 없는게, 이들의 전성기 당시 이들은 서로 대등하게 매치업하며 엎치락 뒤치락하는 수준이었지 유잉만 압도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로빈슨이 데뷔한 89-90시즌의 경우 유잉 퍼스트 팀-올라주원 세컨드 팀-로빈슨 서드 팀이었으며, 91년은 로빈슨/유잉/올라주원 순, 92년은 로빈슨/유잉/브래드 도허티(생애 유일한 서드 팀), 93시즌은 올라주원/유잉/로빈슨이었다. 94,95,96년은 3년 연속으로 유잉이 탈락했지만, 96-97시즌에는 올라주원 다음의 세컨드 팀으로 돌아왔다. 물론 97시즌의 경우 오닐이 51경기, 로빈슨이 거의 시즌아웃된게 결정적이긴 했지만 전술했듯이 90년부터 4년 연속으로 저 세명은 엎치락뒤치락했으며 이 기간동안 이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올라주원의 평가가 급격하게 올라간 것은 첫 우승을 달성한 1994년 플레이오프 직후였다. 무관인 시절엔 팀성적도 받쳐주지 않는데다 코칭스태프와의 마찰까지 있어 훗날 [[케빈 가넷]]이 무관인 시절이었을 때처럼 "혼자만 잘하고 팀을 끌어올릴 수준은 아닌 것 아니냐"는 식의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던 선수였다.] 또한 94, 95년의 경우에도 유잉은 각각 MVP 5위, 4위였다. 실제로 89년부터 92년까지는 올라주원보다 유잉의 MVP 순위가 매년 더 높았다.[* 물론 유잉은 89년에야 처음 MVP셰어를 받았지만 올라주원은 85년부터 88년까지 12,4,7,7위에 올랐다. 89년엔 올라주원 5위/유잉 4위, 90년엔 올라주원 7위/유잉 5위, 91년엔 올라주원 18위/유잉 11위, 92년엔 올라주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고 유잉은 5위에 올랐다.] 올라주원의 경우 랄프 샘슨이란 특급 센터와 트윈타워를 이뤘기에 팀성적 버프로 초반에 수상실적에서 유리했지만 이후 샘슨의 이탈, 팀의 몰락으로 인해 저때 점점 실적이 떨어졌었고, 유잉은 반대로 믿을만한 동료가 없는 상황에서 데뷔해 불리하다가 점점 팀이 강해지면서 성적 버프를 받게 된 것이다. MVP는 기본적으로 팀성적이 상당히 큰 변수로 작용한다. 물론 로빈슨/올라주원/오닐 모두 팀을 정상까지 이끈 공이 있으니 고점에서 확실히 유잉보다 높은 것은 확실하지만, 포인트는 올라주원이 정점에 오르기까지 세간의 평가는 유잉과 비슷하게 "최정상급 선수인 건 알겠는데 우승해서 증명해야 한다" 정도였단 것[* 올라주원이 30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MVP순위 5위가 최고였다는 걸 보면 당시 그의 평가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올라주원은 92년까지 세차례 퍼스트 팀에 리바운드왕 2회, 블록왕 2회, 89년도엔 24.8득점 13.5리바운드 3.4블록 2.6스틸, 90년도엔 24.3득점 14리바운드 4.6블록 2.1스틸이란 미친 스탯을 기록한 괴물이었다. 즉 '개인기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과연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는가?'는 꼬리표가 남아있었다. 실제로 올라주원은 4대 센터들 중 가장 강한 클러치 플레이어로 인정받지만, 94년 우승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클러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있어 1994년 플레이오프 당시 하위시드인 피닉스에게 홈2연전을 패하며 0승2패로 몰리자 '쫄보들의 도시(choke city)'란 조롱을 받기도 했었다. 포인트는 우승하기 전까지 올라주원과 유잉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큰 차이가 없었단 것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기량이나 평가 면에서 비등한 라이벌이었단 것. 많이 간과되는데 94년 당시 유잉은 약간이나마 하락세에 접어든 상태였다. 예컨데 92년도 정도에 파이널에 둘이 붙었어도 저렇게 발렸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물론 내구성과 '짧은 전성기' 역시 실력이므로 유잉이 저들보다 아래 위치란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정리하면 올라주원과 유잉의 라이벌리는, 대학시절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비등한 실력의 두 라이벌 슈퍼센터들 중 올라주원은 팀플레이어로서 한 단계 스탭업해 정점을 찍었고[* MVP 투표순위와 올NBA팀 실적으로 보면 유잉과 올라주원은 92년까지 거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93시즌 MVP 투표에서 올라주원이 2위를 하며 격차를 좀 벌이고(유잉은 4위), 몬스터 시즌을 보낸 94시즌을 기점으로 올라주원이 확 위상이 올라간 것에 가깝다. 물론 그 전까지 올NBA퍼스트팀은 올라주원이 3회, 유잉이 1회였지만 MVP 최고순위는 유잉 4위, 올라주원 5위였다.], 유잉은 끝내 그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둘의 차이가 단순히 팀 차이라고 보는 것도 적절한 평가가 아니고 (분명히 올라주원이 더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하는게 맞다), 반대로 유잉이 아예 올라주원과 레벨이 다른 선수라고 보는 것도 적절한 평가가 아니다. 팬들 입장에선 은퇴한 선수들의 커리어 전체를 보기 때문에 누적 커리어가 떨어지는 유잉의 급이 달라보일 수 있는데, 1990년대 당시에 (일단 전성기가 다른 오닐은 제쳐두고라도) 유잉 vs 올라주원, 올라주원 vs 로빈슨, 로빈슨 vs 유잉은 서로 비등한 슈퍼센터들의 매치업으로 평가받았다.[* 1994 파이널에서 유잉이 올라주원을 막을때 찰스 오클리와 앤서니 메이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 올라주원 역시 유잉을 막을때 오티스 소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똑같이 고강도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양측의 퍼포먼스는 올라주원의 우위였고 그게 결국은 시리즈의 향방을 갈랐다.] 무엇보다 유잉이 올라주원과 로빈슨에게 비비지도 못 할 수준이라면 1989-90 시즌 당시 전경기를 뛴 올라주원을 제치고 유잉이 퍼스트 팀에 오르거나, 1991, 1992년에도 올라주원을 제치고 1993년엔 로빈슨을 제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잉은 도허티처럼 생애 딱 한번 저들을 제친게 아니라, 전성기 당시 지속적으로 저들과 수상 경쟁을 벌인 인물이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팀 던컨]] vs [[케빈 가넷]]이다. 둘의 커리어 전체적으로 보면 던컨은 우승 5회, 파이널 MVP 3회, 퍼스트 팀 10회로 우승 1회, 올해의 수비수상 1회, 퍼스트 팀 5회인 가넷과 급이 다른 선수로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의 전성기 때는 실제로 둘이 대등하게 매치업했으며 대등한 라이벌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전성기 때는 '커리어를 떠나 실력으로 따지면 누가 위인가'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을 정도이다.] 물론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유잉은 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는 누적 커리어와 스탯 뿐 아니라 실제 실력이나 커리어 고점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누적 커리어가 암시하는 것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국내팬들 한정이긴 하지만 당시 넷의 매치업을 지켜보던 1990년대 농구팬들 사이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4대 센터'란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네 명이 당대의 센터들 중에서도 서로 팽팽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역량은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유잉이 2G-2F-1C라는 시스템으로 인해 기량에 걸맞는 수상을 쌓지 못한 건 사실이고, 부상으로 인해 무너져가면서도 투혼을 불사른 위대한 선수인 것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결국 고점과 실적의 한계로 4대 센터들 중 실력, 커리어, 고점, 대외적인 평가는 가장 떨어지는 선수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잉이 저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실제로 맞붙는 상황에서는[* 물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1994 파이널 당시엔 올라주원이 압승했으며, 이에 따라 커리어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들과 팽팽하게 대치할 수 있었던 선수이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4대 센터 중 말석'''이란 게 유잉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셈이다. 유잉은 저 네 명 중 모든 면에서 가장 떨어졌지만, 반대로 1990년대를 주름잡은 뛰어난 센터들 중 저 네 명만 저렇게 묶일 정도로 저 넷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눈에 띄는 활약상을 펼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